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9 혁명/진행 (문단 편집) ===== 서울대학교 ===== 시위 현장에서 가장 가까웠던 서울대학교는 피해가 가장 컸다. 당시 문리대 캠퍼스는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맞은편인 마로니에공원 자리에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관악캠퍼스로의 이전 이유가 서울 시내로의 진입이 용이한 서울대생들을 산골짜기에 격리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서울대학교 정문의 로터리 구조나 전투경찰부대 입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 사실 현재 서울대의 관악캠퍼스는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 심지어 그 일대는 등산객들이 자주 온다.] [[3.15 부정선거]] 및 [[3.15 의거]](1차 마산의거) 다음 날인 3월 16일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서 시작된 논의는 이후 문리대 여러 과의 학생 40명[* 김광의 회고에 따르면, 정치과와 외교과 3학년으로는 윤식(당시 정치학과 학생회장), 유세희, 노건일, 이수정, 황선필, 정종문, 오동휘, 김구, 이장춘, 김홍준, 이영일, 박실, 양성철, 박운서 등, 2학년으로는 최인환, 이청수, 김영작, 이동화, 공선섭 등. 이외에 중문과의 권혁조, 사학과의 노흥권, 철학과의 서정복(격문 작성자), 독문과의 송재곤, 언어과의 김인수(2학년), 국문과의 김석산, 사회학과의 이충호, 이강준이 참여했다.]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이 서울대의 4.19 집행부가 되었다. 이들은 총괄조(1조), 동원조(2조), 선언문 작성조(3조), 결의문/격문 작성조, 플래카드 및 유인물 인쇄조, 조직조, 연락조 등 5인 8개조로 나뉘어 활동하였다. 각 조는 주어진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1조가 먼저 전체 책임을 지고 체포되면 2조가 총괄을 맡고 2조가 체포되면 3조가 총괄을 맡는 식의 '파상적 데모 공세'를 하기로 하였다. 4월 15일, 집행부는 다른 학교와의 연락 끝에 서울 시내 전체 대학의 의거일을 4월 21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최완준과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장영백을 [[고려대학교]]와의 연락책으로 삼았으나 최완준은 기밀 누설을 우려해 의거일을 고대 측에 제때 전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4월 18일에 학생시위를 벌였다가 깡패들에게 피습당했다.]] 집행부는 당혹해 했으나, 18일 오후 3~4시 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뒷동산인 함춘원에서 20여명이 긴급 회의를 열고 25~26일로 연기, 무기한 연기, 19일로 변경 3개 안을 논의한 끝에 19일로의 변경을 확정하였다. 4월 19일 당일에는 1조가 총괄을 맡고, 2~8조가 동숭동 캠퍼스 (당시 주캠퍼스) 및 그 주변에 위치했던 단과대학들을 각각 맡아 (문리대 동쪽, 문리대 서쪽, 미대, 법대, 음대, 의대 등) 동원에 나섰다. 이들은 오전 9시 경[* 정확한 시간은 회고마다 차이가 있다.]에 동숭동 캠퍼스를 출발하여 수의대 앞에서 경찰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으며 법대, 미대, 수의대생들이 추가로 대거 참가하고 투석전과 육탄전을 벌인 끝에 저지선을 돌파하였다. 다음으로 이들은 동대문경찰서 앞, [[탑골공원|파고다공원]] 앞 (여기에서 경찰이 처음으로 최루탄을 사용) 등에 있던 경찰 저지선을 마찬가지로 투석전과 육탄전으로 뚫고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하였다. 국회의사당에서는 여러 대학 학생이 모인 가운데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후 경무대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상대 (당시 성북구 종암동에 위치), 사범대 (당시 동대문구 용두동에 위치), 약대 등의 학생들까지 합류하여 경무대 앞에서는 서울대 학생 약 3,000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경찰의 발포로 7명의 서울대 학생이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서울대생 6명과 [[서울사대부중]] 재학생 원일순(당시 14세)을 포함한 수치이다. 당시에 서울사대부중과 서울사대부고는 현재보다 서울대학교에 대한 소속감이 훨씬 강했다. > 사망자 명단 : 고순자(당22세) - 미술대 3학년, 김치호(당21세) - 문리대 3학년, 박동훈(당19세) - 법대 1학년, 손중근(당22세) - 사범대 4학년, 안승준(당22세) - 상대 3학년, 유재식(당24세) - 사범대 2학년 4.19 혁명을 기리기 위해 [[서울대학교]] 교정에는 4.19 학생혁명 기념탑이 존재한다. 이 기념탑은 관악캠퍼스 이전 후 공대 폭포 옆쪽에 있다가, 2002년 사회대와 법대를 내려가면 있는 두레문예관(67동) 앞으로 이전하였다. 2020년, 4.19 혁명 60주년을 맞아 당시 1조장(즉, 총괄조장)이었던 김광 전 명지대 교수[*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현재로 치면 단과대학 학생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겸 총학생회 수석부위원장]가 대학신문에 회고록을 발표하였다. 현재까지 4.19 당시 서울대 문리대의 역할에 대한 회고 중 가장 자세한 것에 속하며 4.19 당일의 진행 및 4.25 교수시위 등에 대한 내용도 상세히 적혀 있다.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29|링크]] ||[[파일:attachment/419-2.jpg]]|| ||출처 뉴시스.|| 이하는 4월 혁명 선언문. 본래 이장춘[*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이후 외교부 주오스트리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사, 본부대사.]이 처음 선언문을 집필했으나 정치학과 학생회장 윤식[* 이후 베일러대 경제학 박사,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국민대 교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내용이 약하다며 각하하였다. 결국 3조장 유세희[* 당시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서울대 정치학과]]. 이후 컬럼비아대 박사, 한양대 교수, 한양대 부총장]가 초안을 잡고 18일 오후 4시경 도착한 이수정[* 당시 대학신문 기자, 서울대 정치학과. 이후 한국일보 기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부 장관]이 본인의 하숙집에서 집필한 것이 최종 선언문이 되었다. 이를 황선필[*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이후 동아일보 기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방송]] 사장]이 커다란 전지에 붓으로 글씨를 쓰고 등사하였다.[* 등사는 당시 서울대 사학과 한영옥이 했다는 회고도 있다.] 4월 19일 당일에는 1조장 김광이 국회의사당으로 가져가 여러 학교의 대학생 앞에서 당시 [[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유일한 여성 재학생이었던 손 모씨[* 이 인물의 이름은 현재까지 불명이다.]가 읽었다. >象牙(상아)의 眞理塔(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疾風(질풍)과 같은 歷史(역사)의 潮流(조류)에 自身(자신)을 參與(참여)시킴으로써 理性(이성)과 眞理(진리), 그리고 自由(자유)의 大學精神(대학정신)을 現實(현실)의 참담한 薄土(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自身(자신)들의 知性(지성)과 良心(양심)의 엄숙한 命令(명령)으로하여 邪惡(사악)과 殘虐(잔학)의 現狀(현상)을 糾彈(규탄), 匡正(광정)하려는 主體的 判斷(주체적 판단)과 使命感(사명감)의 發露(발로)임을 떳떳이 宣明(선명)하는 바이다. > >우리의 知性(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現狀(현상)이 民主(민주)와 自由(자유)를 僞裝(위장)한 專制主義(전제주의)의 표독한 專橫(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斷定(단정)한다. 무릇 모든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政治史(정치사)는 自由(자유)의 鬪爭史(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如何(여하)한 形態(형태)의 專制(전제)로 民衆(민중)앞에 君臨(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슬픈 것임을 敎示(교시)한다. 韓國(한국)의 日淺(일천)한 大學史(대학사)가 赤專制(적색전제)에의 果敢(과감)한 鬪爭(투쟁)의 巨劃(거획)을 掌(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自負(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論理(논리)의 演繹(연역)에서, 民主主義(민주주의)를 僞裝(위장)한 白專制(백색전제)에의 抗議(항의)를 가장 높은 榮光(영광)으로 우리는 自負(자부)한다. > >近代的 民主主義(근대적 민주주의)의 基幹(근간)은 自由(자유)이다. 우리에게서 自由(자유)는 喪失(상실)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剝奪(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理性(이성)의 慧眼(혜안)으로 直視(직시)한다. 이제 막 自由(자유)의 戰場(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正當(정당)히 가져야 할 權利(권리)를 奪還(탈환)하기 위한 自由(자유)의 鬪爭(투쟁)은 燎原(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自由(자유)의 戰域(전역)은 바야흐로 豊盛(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 >民主主義(민주주의)와 民衆(민중)의 公僕(공복)이며 中立的 權力體(중립적 권력체)인 官僚(관료)와 警察(경찰)은 民主(민주)를 僞裝(위장)한 家父長的 專制權力(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民主主義 理念(민주주의 이념)의 最低(최저)의 公理(공리)인 選擧權(선거권)마저 權力(권력)의 魔手(마수)앞에 壟斷(농단)되었다. 言論(언론), 出版(출판), 集會(집회), 結社(결사) 및 思想(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專制權力(전제권력)의 악랄한 發惡(발악)으로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漆黑(칠흑)같은 밤의 繼續(계속)이다. > >나이 어린 學生 金朱烈(학생 김주열)의 慘屍(참시)를 보라! 그것은 假飾(가식)없는 專制主義 專橫(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裸像(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卑屈(비굴)하게도 威(위하)와 暴力(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百步(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學究(학구)의 良心(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自由(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沈默(침묵)에 自由(자유)의 鐘(종)을 亂打(난타)하는 打手(타수)의 一翼(일익)임을 자랑한다. 日帝(일제)의 鐵槌(철퇴)아래 미칠듯 自由(자유)를 歡呼(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兄(형)들과 같이... > >良心(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永遠(영원)한 民主主義(민주주의)의 死守派(사수파)는 榮光(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現實(현실)의 뒷 골목에서 勇氣(용기)없는 自虐(자학)을 되씹는 者(자)까지 우리의 隊列(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自由(자유)의 秘密(비밀)은 勇氣(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隊列(대열)은 理性(이성)과 良心(양심)과 平和(평화), 그리고 自由(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隊列(대열)이다. 모든 法(법)은 우리를 保障(보장)한다. >---- > 단기 4293년 (서기 1960년) 4월 19일 서울大學校(대학교) 文理科大學(문리과대학) 學生 一同(학생일동)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